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동아시아의 문화와 예술, 종교

worknettwo 2023. 2. 11. 22:45

1.신화

(1)하늘과의 연관성

* ;천손강림형은 중국 남부와 인도지나 북부 타이계, ;한반도 공통. ;

.혼백은 다른 형체가 되어 다른 세계에 산다는 생각 ;

.신수(神樹):나무 매개로 천상,지상,지하가 연결.죽은 혼백이 새로 화함

;중국, ;신수(神樹)(神木,尋木,若木,扶桑,健木)

;한국, ;태백산 신단수

.신조(神鳥):새는 지상과 하늘의 매개. ;

.성스러운 산

;중국, ;곤륜산(崑崙山)(백신(百神)의 소재지이자 상제(上帝)의 도읍지 ;

;한국, ;태백산에 환웅 내려옴. ;

;일본, ;천황가는 다카마가하라(高天原)의 지배자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;; ;그 손자 니니기(邇邇藝(邇邇藝命))가 포대기에 싸인 모습으로, 3종의 神器를 갖고 여러 신들을 거느리고, ;치쿠시(큐슈) ;히카무(日向)의 다카치호노미네(高千穗峯)에 강림

;

(2)수직구조형 신화

.수직구조는 무속세계. ;

;육체는 지하로 가고 영혼은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관념.

.중국, ;神界와 人界는 원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으나 하늘의 사자 중()과 려()가 통로를 끊어 人神의 구별이 엄격해지고 오직 예만이 자유로이 왕래함. ;

;가끔 신계의 황제와 인계의 부족이 결합. ;

.일본, ;이자나기는 하늘, ;이자나미는 땅의 원리 지닌 존재. ;

;아마테라스의 후손 니니기(邇邇藝(邇邇藝命))는 지상의 여인(木花開耶姬(鹿葦津姬)과 성관계 가져 자식 호데리(火照命)와 호오리(火遠理命) ;낳음. ;

.한국, ;환웅과 웅녀의 결합

;

* ;신의 이름들은 한국어와 연관 ;: ;쿠시후루노타케(쿠시=구지)(소호리노미네(소호리=서울))

* ;海神의 존재는 동지나해 인근 중국 강남지역의 신화와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것이 유사해. ;

;

(3)생명관

.중국, ;코스모스와 카오스를 순환하는 자연계와 생명의 영원성,영속성

;서왕모로부터 얻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도망간 항아의 고사

;달의 순환성 ;

;재생, “부활resurrection” ;관념. ;

;불사국(不死國).무계국인은 죽어 땅에 묻혀도 ;1,200년간 심장이 뛰다 다시 살아남. ;

;다른 사람이나 동물로의 환생(還生:trnsformation)이나 변형. (과부는 태양을 좇다 등림(鄧林)으로 변하고 여시(女尸)는 요초로, ;치우는 단풍숲으로 변함. ;전욱과 후직은 물고기로, ;진몽의 딸은 말과 용으로, ;()은 세 발 자라, ;우왕이 곰으로, ;영고가 황사(黃蛇), ;항아가 두꺼비로, ;()와 정위(精衛)가 새로 화함.) ;각자의 토템으로 돌아간다는 뜻. ;도산씨(塗山氏)는 돌로 화하고 견우와 직녀는 천공의 별로. ;혺은 신, ;신선, ;정령으로 변함.

.한국, ;단군이 사후 산신이 됨. ;주몽이 변신 경쟁을 함.

;박혁거세가 죽은 후 몸이 온 나라에 흩어짐. ;

.일본, <古事記>에서 최초의 결혼, ;최초의 경영, ;최초의 출산, ;최초의 죽음 등 태초적이고 시발적인 구현 보여줌. ;

;死體로부터 작물이 발생하는 신화는 죠오몽(繩文)시대 후반기의 화전경작문화, ;水稻경작문화, ;어로민문화 반영. ;

* ;이는 인도네시아, ;멜라네시아, ;남미 등에 분포하는 신화로 열대의 감자류,과수재배민 문화이자 잡곡기원신화, ;중국남부 화전경작 문화와 동일함. ;

;

(4)애니 미즘, ;토테미즘, ;샤머니즘 혼재

.중국,<산해경>(<대황북경(大荒北經)>에서 한발(旱魃)을 쫓아보내려고 주문을 읊음.;황제와 치우의 싸움에서 황제가 기우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피리를 불어 용의 울음소리를 냄.(언어주술)

.한국, ;가야인들이 김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구지봉에서 노래를 부름

.일본, ;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만남에서, ;이자나미는 ;내 몸에 자라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”, ;이자나기는 ;내 몸에 자라는 부분이 있어요라 수작.

(5)모권제에서 부권제로

.중국, ;(같은 혈연계통의 이름)은 모계사회에서 ;

;(핏줄의 계통)는 부계사회에서 나온 것 ;

;태양의 감응으로 알을 먹고 은() ;민족의 시조인 설을 낳음.

;강원(姜原)이 거인의 족적을 밟고 감응받아 주나라 시조 후직(后稷)을 낳음.(부친을 몰랐던 탓에)

;유목사회(독립적,침략적)에서 농경사회(자연에 대해 순종적,의존적,보수적,수직적 유대 강화)

.한국, ;하백의 딸 유화부인에게서 주몽이 나옴. ;

.일본, ;이자나기의 우세를 주장함은 가부장권 확립 ;

;

;

2.문학 ;

(1)금석문(金石文)의 비교 ;

.중국, ;진각석(秦刻石), ;남소(南言+)의 각라풍왕(閣羅風王) ;덕화비(德化碑)

.한국의 광개토대왕비, ;고구려 중원비, ;신라 적성비와 진흥왕순수비, ;

.일본의 ;이예국탕강측비(伊豫國湯岡側碑)’ ;

;국왕의 위엄, ;국가의 위업(偉業) ;기려.

;

(2)시가의 형식

.중국은 한대에 사부(辭賦), ;악부민가(樂府民歌), ;오언시(五言詩) ;분리 ;

;공동문어시가는 사().().(), ;

;구어(口語)는 악부민가(樂府民歌)(후에 근세에는 백화시(白話詩)라 함.) ;

.한국과 일본에서

;공동문어시가는 시()

;민족구어시가는 가()(한국은 향가(鄕歌), ;일본은 화가(和歌)). ;

;향가에서는 민족의 정서, ;생활의 느낌, ;상하층이 함께 즐기려는 의식. ;특히 한국의 향가가 그러함. ;

;화가는 귀족생활의 관심사.

.한국, 612년 을지문덕의 ;<여수장우중문시(與隋將于仲文詩)>가 최초의 시

;594년 융천사 ;<혜성가>가 최초의 향가. ;

;888년 편찬한 ;<삼대목(三代目)> ;전하지 않아, ;

;신라 향가 ;14. ;향가는 ;4음보.

.일본, 751 ;<회풍조(懷風藻)>

;827 ;<경국집(經國集)>

;8세기 후반 ;<만엽집(萬葉集)> 4 ;5백여 수

;한국에서 이주한 야마가미 오쿠라(山上億良) ;<회풍조(懷風藻)>에 글을 남기고 ;<만엽집(萬葉集)>에서도 시인으로 활약. ;

;화가는 ;5.7.5.7.7.확립. ;

* ;한문(漢文)의 필요:덕화(德化) ;표방. ;제도와 문화의 능력으로 국가 운영.

* ;한반도에서 받아들인 한문 덕에 일본은 아이누 정복, ;지배.

* ;한자로 민족어 적는 한국의 향찰(鄕札)(음운 복잡해 ;15세기에 다시 만들어)

* ;가나(假名)(음절구성이 간단해 오늘날까지)

;

(4)불교문학 ;

.기행문 ;

;중국, 7세기 현장(玄裝) ;<대당서역기(大唐西域記)> ;

;한국, ;혜초(蕙超) ;<왕오천축국전(往五天竺國傳)>

;일본, ;엔닌(員仁) ;<入唐求法巡禮行記> ;

.정통 한시 ;

;중국, ;宋代에 혜홍(惠洪)과 도잠(道潛)

;한국, ;고려 후기에 천정( ;), ;충지(冲止)

;일본, 13세기 이후 신란(親鸞), ;도겐(道元)

.한문학의 전파와 독자적 발전 ;

;중국, ;한문학을 민족적으로 소화해낸 金의 원호문(元好問)

- ;()의 야율초재(耶律楚材), ;살도자(薩都刺), ;관운석(貫云石)이 뒤 이어

;한국, ;이규보(李奎報)(1168-1241),진화(陳澕)가 한문학을 민족적으로 승화

- ;뒤를 이어 정도전, ;김시습, ;서경덕, ;이황, ;이이가 등장. ;

;일본,15세기 五山의 승려들. ;특히 ;풍류(風流)”라는 말로 성애(性愛)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잇큐우 소우쥰(一休宗純). ;

- ;선종(禪宗)의 발상을 일본문화의 특성을 바꾸어 놓아. ;승려들의 ;동성애(同性愛) ;마저 ;선종 세속화’. ;표현의 격조와 보편적 가치, ;민족의식 희박.

.중세의 철학적 문학이념 ;

;중국, ;철학자 주희(主熹) ;문학을 ;재도지기(載道之器)”로 본 사상은 ;16세기 조선의 이황(李滉)에서 다시 ;17세기 일본 후지와라 세이카(藤原星窩)에게로.

- “道外無文, ;文外無道 ;주장.

.근세로의 이행 ;

;중국, ;청의 왕부지(王夫之) ;도의의 구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바를 나타내면 진실된 문학이 된다는 생각 ;

;‘기일원론(氣一元論)’, ;조선의 임성주, ;홍대용, ;박지원이 설득력 있게 전개

;일본, 18세기 모토오리 노리나가(本居宣長)이 국학(國學)을 일으켜

- “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되찾으려면 유교 도덕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;

* ;그러나 모토오리 노리나가(本居宣長) ;이래 일본 국학(國學)은 신화와 역사를 혼동하고 문화의 특수성과 사상의 보편성을 혼동한 약점이 있다고 함. ;

.근세 문학의 담당층 ;

;중국, ;신사(紳士)였다가 몰락한 작가들, <서유기(西遊記)>를 지은 오승은(吳承恩), ;희곡을 지은 탕현조(湯顯祖), <유림외사(儒林外史)>를 지은 오경체(吳敬楴), <홍루몽(紅樓夢)>을 지은 조설근(曺雪芹)

;한국은 양반과 중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, ;김만중, ;조성기, ;이정탁, ;심능숙, ;남영노 등이 각각 출신 성분이 다름. ;

- ;다만 허균 등에 이르러서는 불우한 처지의 양반으로 시대에 대한 울분 ;

;일본, ;국문학 작가는 대부분 초닌(町人) ;출신으로, ;오사카 초닌 출신의 이시바라 니시츠루(井原西鶴), ;우에다 아키나리(上田秋成), ;로우닌(浪人)의 자식임에도 극작가로 알려진 치카마쓰 몬자에몬(近松門左衛門), ;비슷한 처지의 쿄쿠테이 바킨(曲亭馬琴) ;. ;

;

;

3.미술

* ;미술 중에는 불상과 고분벽화가 가장 오랜 시대의 것부터 남아있어. ;

(1)고분벽화

.중국

;전한(前漢) ;시대 이래 송,,명대까지 ;1000년 간 지속

;() ;대 성행:표면에 저부조로 그리는 화상석묘.

;육조시대,당대(唐代):긴 묘도(墓道)에 의장(儀仗)행렬도, ;청룡.백호.

- ;서왕모, ;동왕공, ;복희(伏羲), ;여와도(女와圖), ;수하인물도(樹下人物圖), ;화훼도(花卉圖), ;주악도(奏樂圖) ;.

;후대로 가면 방상씨(方相氏)와 같은 귀형(鬼形), ;선계(仙界)의 사슴 등. ;

;

.한국

;고구려 무용총, ;각저총 등 ;5세기 이후 벽화에는 한국적 주제 많아.

;고구려 ;7세기 오회분묘(五盔墳墓)에는 龍이나 다양한 신()의 표현들

- ;나무 아래 망치를 두드리는 야장신(冶匠神), ;바퀴를 굴리는 제륜신(製輪神), ;불의 신, ;농사의 신) ;장천 ;1호분의 불상에 예배를 드리는 장면과 그 주변의 다양한 형태의 연화문. ;아름다운 귀갑형(龜甲形) ;화염인동문 속에서 신선이 화생(化生)하는 모습. ;

- ;덕흥리 고분, ;약수리고분, ;무용총, ;장천1호분 등의 수렵도가 특히 두드러져.

- ;안악 ;3호분과 무용총에서 매부리코를 한 서역인들. ;

;668년 고구려 멸망과 함께 특히 고구려가 즐겨 사신도(四神圖)(주역(周易)의 영향 받아 그린 그림)를 그리던 전통은 끝나.

;발해에서 전통 이어,고구려의 복식이나 당대의 행렬, ;사신도 결합

;고려, ;십이지(十二支)(중국 전통),송죽매(松竹梅),말과 마부,공양도 등.

;조선 초기에는 밀양의 박익묘(朴翊墓)까지.

* (참고).중 두 나라에 모두 있는 주제들

은 묘주도(墓主圖), ;관리(官吏).시인도(侍人圖), ;행렬도(行列圖), ;수렵도(狩獵圖), ;대련도(對鍊圖), ;무인(武人).역사(力士), ;연희도(演戱圖).신괴도(神怪圖), ;사신도(四神圖). ;

;

.일본

;다카마츠총(高松塚)에서도 발해와 같은 전통. ;

;1972년 다카마츠총(高松塚)에서 나온 고분 벽화는 차림새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 받은 것. ;당나라는 치마를 상의 위에 입으나 고구려는 치마의 위쪽에 윗옷을 내놓는 오버 블라우스형이고, ;저고리, ;스커트, ;스커트 자락의 찬 등도 고구려 스타일. ;머리 역시 앞 쪽에서 추켜올려 뒤쪽에서 묶는 고구려 풍속. ;

;

(2)불교 조각 및 불상

.중국에서 한국으로 ;

* ;한국 불상의 표정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것이 특징. ;의궤(儀軌)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여 새로운 도상(圖像)을 창안. ;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불교 정신에 들어맞아.

* ;양 손을 가운데 모두어 보주(寶珠)를 받들고 있는 모습은 중국에는 없고 백제에서만 나타나는 양식.

* ;인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;3국에서 화감암으로 부처나 탑을 조각한 것은 우리나라 뿐. ;전체를 하나로 보고 조각해야 하고 사실적이고 정교한 조각 어려워. ;화강암의 바위 면에 불상을 얕게 새긴 마애불이 유행. 8세기 석굴암으로 꽃을 피워. ;

;. ;(). ;원대로부터 한국에 불교미술 전래. ;()의 영향 보여주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상과 월정사, ;강릉신복사지 탑 앞 석조보살상이 쓰고 있는 높은 보관(寶冠).

;()대에 소멸된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크게 유행. ;중국에서는 부분적이고 종속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독립적. ;

;송으로부터 원풍연간(元豊年間:1078-1085)에 전래된 흥왕사 협저(夾紵) ;불상. ;송의 휘종이 안화사에 하사한 소조나한상. ;개성 천마산 보살반가상. ;남송의 영향 보여주는 안동 봉정사 목조보살상. ;

;1348년의 ;경천사 ;10층석탑은 송과 원대의 다양한 형식이 결합된 형식. <신증동국여지승람> ;원에서 공장을 뽑아다 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여.

;원대인 ;1345년 북경 거용관 부조여래좌상, 1336년 북경 고궁박물관 소장 동조여래좌상과 비교되는 한국 불상으로, 1361년 작품으로 추정되는 전북 익산 원수리사지 출토 순금여래좌상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여래좌상.

;원나라 때는 직접 목장들이 와서 금강산 장안사, ;연복사 동종(銅鐘), ;해주 신광사 등을 건축하였음.

* ;고려의 여인으로 황후가 되었던 기()황후가 아들이 황제가 되라고 빌기 위해 금강산에서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킨 역사적 사실과 부합. ;

;<조선왕조실록>에 따르면 ;1406, ;명나라 사신이 원이 장인에 의해 주조된 법화사 아미타삼존불상을 가져갔다고 함.

;

.(일본)

* ;조각의 ;90% ;나무재료 세계에 유례없이 고집. ;나무는 예로부터 하늘의 신령이 지상으로 하강하던 내려오던 매개. ;

;백제가 전해준 ;석가불의 금동상(金銅像) 1를 본 천황, “부처는 얼굴[像貌]이 단엄(端嚴)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 ;

;7세기부터 불상 제작 본격화:구리 주조하여 제작한 금동불 주류. 8세기까지.

;8세기 후반부터 ;9세기: ;하나의 나무를 이용한 이치보쿠초우조우(一木彫像) ;유행. 7세기 목조상이 활엽수인 녹나무를 이용한 데 비해 ;8세기 이후에는 주로 침엽수인 카야(비자(榧子))나무 이용.

- ;당나라에서 일본으로 온 감진(鑑眞)의 지고 하에 제작된 토우쇼우다이지(唐招提寺) ;목조상의 재료가 비자나무.

* ;비자나무는 인도에서 불상을 제작하던 향나무이 일종인 백단(白檀)을 대신하던 백목(柏木)이라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 있어. ;백단 대신 백목을 써도 좋다는 말은 중국 현장의 제자 혜소의 ;<십일면신주심경의소>에 나오는 말.

;아스카시대 작품, ;일본 국보 ;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백제의 영향.

;남송(南宋)의 영향 보여주는 교토(京都)의 샌요우지(泉涌寺) ;목조보살상. ;

;11세기 나무 끼워 넣는 요세기즈쿠리(寄木造)기법 유행. ;대형 불상 만들어. ;

;12세기에 눈에 수정(水晶)을 끼워 넣는 옥안(玉眼) ;기법 발달. ;

;

;

4.사상 ;

(1)유학.주자학 ;

.중국 ;: ;공자(551-479 BC)

;<시경(詩經)>,<서경(書經)>,<예기(禮記)>,<악기(樂記)>,<주역(周易)>,<춘추(春秋)>의 육경(六經):인의(仁義), ;효제(孝悌), ;수양(修養), ;치국안민(治國安民)

;‘전국시대 유가 ;8학파 ;맹자는 인정(仁政), ;순자는 예교(禮敎)로 이해 ;

;() ;사마담(司馬淡) <논육가요지(論六家要指)>, ;한서(漢書) <예문지(藝文志)>

;진시황의 분서갱유(焚書坑儒) ;이후, ;한대 동중서(董仲舒)가 유학 부흥, ;삼강오륜(三綱五倫) ;체계화

;위진(魏晉)시대 왕필이 주역(周易) ;해제, ;논어(論語) ;해석. ;하안 ;<논어집해(論語集解)> ;저술.

;동한(東漢)시대 불교 전래 이래 유교 위축 상황

;당나라 중엽 한유(韓愈)(768-824;한퇴지) ;도통설(道統說)로 불교의 ;법통설(法統說)‘에 대항. ;

;유종원(柳宗元(773-819)) ;원기(元氣)는 스스로 움직인다며 이학(理學) ;사상의 단초 마련. ;

;당 태종이 경학(經學) ;강론 열자 신라, ;고구려, ;백제에서 유학생 몰려.

;북송 시기의 주돈이(周敦 ;) ;태극설’, ;정재와 이정(二呈) ;일물양체론(一物兩體論)‘이나 ;심성(心性)이 이 주자학의 길을 열어. ;

;주희가 집대성. ;본체론, ;방법론, ;인식론, ;윤리관. <사서집주(四書集注)>

;원나라 통치이념. ;여타 철학 이단으로 탄압. ;

;명나라 중엽부터 청나라 시기, ;이지, ;황종희, ;왕부지 등이 주자학과 양명학 비판, “경세치용(經世致用)” ;주장.

;청나라는 주자학 강조. <성리정의(性理精義)> ;편찬. ;주자학 외에는 이단으로 탄압.

;신해 혁명 및 ;5.4운동 시기 주자학 비판.

;

.한국

* ;유학의 천명관(天命觀)이 한국의 천신(天神) ;숭배 및 조상 숭배와 잘 맞아.

* ;고구려 편당은 사학. ;평민의 자제도 받아들여. “유교무류(有敎無類)”.

* “파사현정(破邪(顯正)”. ;다른 학파, ;철학 철저히 탄압. ;특히 자국 고유문화, ;그 예로 최제우(1824-1864) ;동학 ;사교(邪敎)로 몰아 탄압. ;

;한자(漢字) ;전래:전국시대 화폐인 명도전(明刀錢), ;진나라 철제 창, ;서한(西漢) ;동종(銅鐘) ;뒤에 한자 새겨져. 109년 한사군(漢四郡) ;설치 ;

;고구려 영양왕 ;11 ;유기(留記)”,고구려 태조왕대 왕의 공적 바위에 새겨 ;

;봉건제가 확립된 고구려 가장 먼저 유학 받아들여. ;소수림왕(371-0384)에 통치사상으로 확립. ;교육기관 ;태학’(오경박사(五經博士)),지방에 ;편당(扁黨)’ ;세워. ;오경(五經) ;삼사(三史) ;가르쳐.

;백제, ;고구려 통해 유학 받아들임. 3,4세기경 교육기관, ;오경박사제. ‘육좌평’,‘16등급 관제’,지방에 ;오부오방제’(음양오행사상 영향). ;

;차차 바닷길 개척, ;남북조와 직거래 경학(經學) ;영향 받아. ;

;신라, 3세기 말에서 ;4세기, ;백제 통해 유학 받아들여. ;한강 유역을 통해 중국과 교류, ;지증왕(500-514)과 법흥왕 때 중국 식 명호와 제도에 따라 왕의 호와 시호. ;유가 방식으로 국호와 연호.

;고려, ;최충의 구재학당(九齋學堂), ;후에 향교(鄕校)로 개칭, ;국가에서 경학박사(經學博士) ;파견. 958년 광종 때 과거제(원래는 최치원이 주장)

;고려 안향(1242-1306) 1209년 집현전 태학사로 원에서 주자학 익혀. ;백이정, ;우탁, ;권보, ;이제현(주자학을 근거로 현실 개혁 주장) ;

;여말 선초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, ;정도전, ;권근 배출, ;조준, ;박초 등. ;

;개혁파 조준, ;정도전(배불론(排佛論)) ;1392년 이성계 도와 주자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.“()가 있고 난 후에야 기()가 있다 ;

;권근의 ;<입학도설(入學圖說)> ;판각으로 출판, “이일원론(理一元論)” ;연구.

;훈구파와 사림팡 사화(士禍)(1498-16세기 중반)

;조광조, “파사현정(破邪顯正)”, ;한전제,현량과,양인제 실시 주장. ;

;이황(1501-1570),한국 주자학 집대성. ;주희 사상(“사단(四端)은 이()가 발하는 것이고 칠정(七情)은 기()가 발하는 것이다”)를 발전시켜(사단(四端)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, ;칠정(七情)은 기()가 발하고 이가 타는[] ;

;이이(1536-1584), ;자주정신(주자 비판), ;실천(10만 양병설), ;애민, ;애족 ;

;

.일본 ;

* ;()의 관념 받아들여: ;효도(孝道),정절(貞節)

* ;신분등급 사회였으므로 과거제 수용 안 해. ;교육기관에서 귀족자제만 교육

;405(?) ;백제 아신왕(阿辛王)14년 오경박사 왕인(王人), <논어> 10권 전달.

;6세기, ;게이타이(繼體) ;황제 ;7(513) ;백제박사 은양이(殷楊爾), ;긴메이(欽明) ;천황 ;15(554) ;고구려 오경박사 고안무(高安茂)와 왕유귀(王柳貴), ;역학박사 왕도량(王道良) ;등이 전파. ;

;스이코(推古)천황(562-628) 8년 고구려 담징(曇徵) ;오경(五經)과 채색종이, ;먹의 제조 방법 일러줘.

;스이코 천황 ;15(617) ;오노 이모코(小野妹子) ;수나라에 파견. ;국서에 ;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황제에게 ;운운. ;대화(大化) ;혁신의 근간 이뤄. ;

;나카노 오에(中大兄) ;황자가 고토쿠(孝德) ;천황(645-654) ;옹립, “대화 혁신”, ;수당의 정치 제도 본따 개혁 진행. ;유학을 정치이념으로. ;천명관. ;

;텐지(天智)천황(662-671) ;시기에 중앙에 ;다이가쿠료(大學療)’, ;지방에 ;고쿠가쿠(國學)’ ;설치.백제 사람 귀실집사(鬼室集斯) ;대학료 ;초대 대학두(大學頭:장관)에 임명. ;유학 고전 가르쳐. ;

;불교와 신도(神道)의 영향으로 배척 당해. ;

;헤이안(平安) ;시대(794-1185) ;후지와라(藤原)가 봉건제도 확립 위해 본격적 유교 전파.

;1199년 송에 유학한 승려 슌조, ;불학과 주자학 배워, 1211년 유학서적 갖고 돌아와. ;이어 임제종 시조인 벤인 엔이(辨園園爾) ;등 승려가 교토의 다섯 개 절과 가마쿠라의 다섯 개 절에서 ;五山 ;개설. ;

* ;그러나 주자학은 불학의 전수를 위한 것이었고, ;문학과 역사학에만 치중해.

; ;켄게이는 고다이고 천황의 시강(侍講)으로 ;<사서집주> ;강의.

; ;에도시대에 학문으로 전개, ;후지와라 세이카(藤原星窩)(1561-1619) ;에도 정부에 관학으로 천거. ;

* ;승려 후지와라는 임란시 포로가 된 퇴계 제자 姜沆과 조선사절단이었던 김성일(金誠一), ;허잠(許箴) ;등과 교류하며 주자학에 눈 떠. ;

; ;그 제자 하야시 라잔(林羅山)(1538-1657). ;배불(拜佛). ;유교와 신도 합일.

; ;유물론자 무로 큐소(室鳩巢)(1658-1734) ;. ;에도 막부의 봉건 통치 도와. ;막부를 높이고 천황을 낮춰. ‘학문소(學問所)’,후에 ;명륜당(明倫堂)’, ‘홍도관(홍도(弘道館)’이라 부른 교육기관.

;관념론자 야마자키 안사이(山崎闇齋), ;이황의 ;<자성록>,<주자서절요(朱子書節要)>로 공부. ;유교 일본화(“공자가 대장이 되어 쳐들어오면---”, ‘수가신도(垂加神道)’(神道 체계 확립) ;창시. ;존황(尊皇)운동, ;왕정복고(王政復古)의 사상적 기초. ;그밖에, ;퇴계 숙독한 구마모토학파 오츠카 다이야(大塚退野)(1677-1750)

;상품경제 발달로 고학(古學),양명학(陽明學),국학(國學),난학(蘭學) ;유행.

* ;국학:<일본서기>,<고사기>,<만엽집>에 나오는 일본신화에 근거, “일본정신(日本情神)”, “황국(皇國)의 도()”, “황국정신(皇國情神)” ;고취. ;외래사상 배척한 가다노 아즈마마로(荷田春滿)(1660-1730), “복고국학(復古國學)” ;주장한 가모노 마부치(賀茂眞淵)(1697-1769) ;. “만세일계(萬世一系)” ;주장한 모토오리 노리나가(本居宣長)(1730-1801). “일본은 만국의 본국이고 조국이라고 주장하며 ;대화혼(大和魂)” ;주창한 히라타 아츠네(平田篤胤)(1776-1843)

;

(2)불교

.중국

* ;유교의 보조적 지위. ;현실적 제약. ;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전, ;계율. ;

;기원 전후 양한(兩漢) ;교체기에 도교와 통하는 도술(道術)의 하나로 전래. ;

;동한(東漢) ;시대 안세고(安世高) ;소승(小乘)불교’(도가의 호흡법 받아들여), ;지루가참(支婁迦讖) ;대승(大乘)불교‘(도가 무()사상, ;현학(玄學))

;위에서 동진에 이르는 시기 ;200년간, ;불경 ;702 ;1,493권 번역돼. ;후조(後趙) ;불도징(佛圖澄) ;이래 출가 인정. ;남북조 이래 열반학(涅槃學)으로 백성들이 현세적 고난 잊고 피안 추구해 위정자가 좋아해. ;수당시대에 흥성. ;

;천태종은 남북조대에 기원, ;수대에 창립, ;당대에 흥성. ;지의(智顗)(547-597)가 창시.“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중관(中觀)”,“모두에게 불성(佛性)이 있다.”

;화엄종은 ;7세기 이래, ;두순(杜順), ;지엄(智嚴), ;법장(法藏), ;징관(澄觀), ;종밀(宗密) ;, ;종밀은 당 덕종의 문사(門師),교수(敎授),“진국대사”. ;황제에게 보살계 주는 등 통치계급 지지받음. “법계연기설(法界緣起說):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연계”. ;통일성 강조, ;관념론에 흘러. ;종밀은 ;원융무애(圓融無碍)” ;발전시켜 유,, ;삼교회통(三敎會通)” ;주장.

;선종은 달마로부터 혜가(慧可) ;등을 거쳐 북종의 신수(神秀)(점수(漸修)), ;남종 혜능(惠能)(돈오(頓悟):()과 불()의 관계). 8세기 당중엽 이래 남종이 주류로 송,,,청까지. “정성자오(淨性自悟)”, “돈오성불(頓悟成佛)” ;

;

.한국 ;

* ;처음부터 대승 위주로 전래. ;선교종의 단일성. ;타종교와 통합. ;탈세속적.

;고구려 소수림왕 ;2(372) ;전진(前秦)에서 불상과 불경 수입.(전진은 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국이었으므로) ;수나라 때 한국 유학생 천태산에 와서 불학 배워. ;고국양왕과 광개토대왕, ;백성 무마책으로 불교 장려. ;승랑(僧朗)은 중국 양나라에 가서 삼론종 지도해. ;수당대에 실법사(實法師), ;인법사(印法師). ;

;백제, ;백제 ;15대 침류왕 원년(384) ;마라난타가 인도 불교 전달. ;백제 ;25대 성왕대 국교로 인정. ;위덕왕대 현광은 중국 남조에서 구법, ;남악 형산 구영당에[ ;그려진 ;28 ;대사의 하나가 되고 천태종의 국청사 조당에도 그려짐. ;

;신라에는 눌지왕(417-458) ;말엽부터 법흥왕 ;14(527)까지. ;고구려 묵호자의 향() ;사용. ;법흥왕대 이차돈 순교. ;문화적 열등감 누르고 국민 단합 꾀해.

;고려는 백성들 마음 끌고자 치국의 방편으로 삼아. 4대 광종(950-975)대 승과(僧科),왕사(王師),국사제(國師制) ;시행. ‘고려대장경은 아시아 불경 집대성.

;천태종은 백제 현광, ;신라 연광, ;고려 의천이 송에서 들여와. ;고려시대 ;“5 ;9”, “5교 양종”. ;광종 때는 체관이 천태경전을 중국으로 가져가 정체된 천태종 부흥에 기여, ;천태산에서 입적. ;중국 천태종 ;16조 의통은 고려인. ;

;화엄종은 당에서 의상(義湘)(625-702)이 들여와. <화엄일승법계도> :“사물과 현상의 상호의존과 무차별성”. ;고려 초기 균여:“일여(一如) ;사상

;해동종(海東宗)은 원효, <대승기신론소> ;등 중국 등에 소개. ;삼론종과 유식종 비판, “화쟁(和爭)의 논리 ;

;선종(禪宗)(조계종)은 신라 말, ;지눌(知訥)(1158-1210) ;창도. ;무신난 이후의 이데올로기. ;선을 기초로 교종 융합. “진심(眞心)” “사람이 부처

;

.일본

* ;국가화된 종교. ;봉건 통치기구 역할. ;세속화. ;사회화. ;

;6세기 긴메이 천황 때인 ;538년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 전달. ;위덕왕은 ;587년 건축가와 화공 보내. ;스이코 천황 시대, ;소가노 마코(蘇我馬子) ;권력 장악으로 백제 불교 유입, ;법흥사 건축. ;

;스이코 원년(593) ;고구려에서 혜자(惠慈)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. ;스이코 ;10(602) ;백제에서 관륵(觀勒)이 역서와 천문, ;지리 서적 갖고 옴. ;쇼토쿠 태자도 법화경 강의, ;사회도덕 확립. ‘헌법17조의 제1 ;以和爲貴”, ;2 ;篤敬三寶 ;

;불교 수입은 문화 수준 향상에 이바지. ;예술과 농기구 제조, ;건축술 발달.

;625년 고구려 당()유학파 혜관이 삼론종 강의, ;일본 삼론종 시조가 됨. ;나라시대의 종파는 ;남도 육종(南都六宗)”, ;혹은 ;나라 육종(六宗)”

;645 ;다이카개혁에 텐무천황 칙령으로 가정마다 불단 설치(“內佛 ;시작) ;

;653년 사이메이 천황때 법상종 강의한 도소(道昭) ;화장 ;유언, ;화장문화 시작. 658년 지통(智通)과 지달(智達)이 신라 배를 타고 당에 가 법상종 배워. 703년 신라인 지봉(智鳳)과 지웅(智雄)이 당에 가 법상종 배운 후 일본으로 와.

;736년 중국인 도선(道璿) ;동대사에 화엄경 강의하러 왔을 때 신라인 심상(審祥)도 대안사에 머물다 강의.

;9세기에 구카이(空海),11세기 겐신(源信)의 독자적 해석, ;가마쿠라 시대(1192-1333)와 무로마치 전기, ;민족불교 형성. 13세기 무사의 정신적 지주.

;천태종은 중국 천태종에 밀종, ;선종, ;보살원계(菩薩圓戒) ;부가한 종파. ;창시자 최징(最澄) 804, ;구카이와 함께 입당(入唐)하여 유학. ;

;밀교인 진언종 창시자 구카이, ;가다카나(片仮名)를 만들고, ;최초 사립학교인 ;<종예종지원(綜藝種智院)> ;세워 불교와 유교 가르쳐. ;국가 안정 수호, ;재앙 없애고 복을 쌓는 것이 경서를 읽고 불사를 하는 이유라고 가르침. ;

;정토종은 법연(法然)이 창립, “염불만으로 사후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;

;정토진종은 신란(親鸞)이 창립, ;승려의 육식, ;결혼 허용. “이행도(易行道)”

;선종은 에이사이(榮西)와 도겐(道元)이 창시, ;에이사이는 중국에서 귀국, ;하카다 쇼후쿠지 거쳐 교토에서 임제선 제창. ;천태종, ;밀종, ;선종 융합. “유아주의적(唯我主義的) ;관념론”. ;조정과 막부 장군 지지. “오산문학(五山文學)” ;형성.

;일련종(법화종이라고 부름), 13세기 ;천민의 아들 ;니치렌(日蓮)(1222-1782) ;창립. “‘妙法蓮華經 ;다섯 글자만이 중생 구제해 ;전염병,지진,재앙은 법화경 믿지 않아 천신이 노하기 때문이라 설파. ;막부의 박해. ;

;

(3)도교 ;

* ;동아시아 농경국가에서 토지신 숭배. ;자기민족의 문화 적 토대 위에서 수용. ;주로 민중들이 선호. ;

.중국 ;

* ;도가와 도교 구분. ;도가는 철리를 말하는 학술유파. ;도교는 신앙적 목적.

;토착 민족종교 ;: ;민간신앙,무술,방기(方技) : ;신선신앙+도가+황로학(黃老學)+유교+불교+참위(讖緯)+음양오행설+의학+점복(占卜) : ;불로장생(不老長生)과 신선(神仙)이 목적. “내단학(內丹學)”,“양생술(養生術)”.

;동한(東漢) ;, ;태평도(太平道), ;오두미도(五斗米道) ;형성. ;정치의 피폐와 백성의 경제적 곤궁 등 사회 혼란. ;불교를 신선도술로 인식. ;

;위진남북조시대, ;신선 도교. ;태상노군(太上老君) ;최고신으로 받들어 신학 수립. “道敎라 불러. ;노자의 ;<도덕경>을 최고의 경전으로 여겨. ;

;진대에 통치자의 신권(神權)사상과 도참사상, ;귀신 숭배, ;무속 성행 속에 갈홍(葛洪)이 신선도의 교리와 방술체계 정비해 이론적 기초 다지고, ;구겸지(寇謙之)와 육수정(陸修靜)이 오두미도 재창건, “예도(禮道)”로 제왕들 숭앙, “관방(官方) ;종교화”. ;불교 교리 모방, ;재계(齋戒) ;규율 만들어. ;도홍경(陶弘景) ;삼교(三敎) ;통합”. ;불교 영향으로 경전(經典)이나 신상(神像),신선 족보 만들어. ;신선 이야기는 초나라 문화권에 흩어져 있던 신화와 전설 수집.

;당나라 이() ;황실, ;노자의 성이 이씨라며 당실 조상으로 보셔. “청정무위(淸淨無爲)”가 치국이론. ;노자는 사실상 당나라 호국신. “도교외단술(道敎外丹術)” ;발전. ;당나라 여섯 황제 단약(丹藥) ;부작용으로 죽어. ;도사가 정치에 개입. ;시인 이백을 ;적선(謫仙)”,“시선(詩仙)“이라 불러. ;예술 발전. ;점차 ;내단(內丹)“ ;강조. ;

;남송(南宋), ;명 중엽까지 발달하다 명 중엽 이후 관방도교 쇠퇴, ;민간도교 번성. “수련하면 누구나 신선이 될 수 있다

;다신(多神) ;숭배. ;관우(關羽), ;용왕, ;화신, ;산신, ;지신 등. ;도사 증가. ;세속화, ;민간화 하다가 쇠퇴. ;부적으로 복을 비는 정일교(正一敎)만 남아. ;

;

.한국

* ;신선숭배 사상은 가장 오래된 한국의 토속적 종교.

;고구려 ;7세기 무덕(武德),정관(貞觀) ;연간에 오두미교 신봉. ;중국에서 천존상과 ;<도덕경> ;전래. ;보장왕 ;2(643) ;연개소문 건의로 수입, ;흥성. ;제천의식.

;백제에 ;탑은 많아도 도사가 없었다” (<후주서(後周書)>)하나, <조선도교사> ;저자 이능화와 일본학자 구로자카 가스미(黑板勝美) ;왕인이 일본에 전한 경전 중에는 유교 경전 외에 도가 경전이 있었을 것이라 봄.

;신라,혁거세에서 소지왕때까지(57-449) “무위자연(無爲自然)” ;신봉. ;풍류(風流), ;국선(國仙), ;선풍(仙風) ;등 숭상. “화랑(花郞)정신”. ;신라 말기에 김가기(金可紀) ;등이 당에 들어가 내단도(內丹道) ;전수받아 최치원에게 전수. ;

;고려, ;역대 국왕 도교 숭배. ;각지에 도관(道館) ;세워. 18대 예종대에 연경궁 후원에 ;원시천존상(元始天尊像)’ ;세우고 제사 지내. ;의종대에 도교 의식 참가 도사와 불승 수백, ;무신난에 의한 퇴위 원인 제공. “풍수도참(風水圖讖)” ;

;조선시대, ;이성계 궁내에서 도교행사 계속. ;김시습. ;한무외. ;소격서(昭格署)(임란 이후 폐지). ;민간에 침투. ;혼사(婚事) ;정하고 제()를 지내며 길일(吉日) ;택하는 풍습. “삼교일치(三敎一致)” ;주장한동학’, ‘대종교(大倧敎)’는 도교적 색채와 형식 더 많아. <동의보감(東醫寶鑑)>에서의 ;도정의조(道精醫粗)”.

.일본 ;

* ;도교에 대한 자각 없이 중국 민간도교 받아들여 자국 고유신 숭배에 활용.

* <후쿠나가 히로시(福永光司)> ;천황사상과의 관련성.:7세기에 천황을 일컫던 ;진인(眞人)”은 도교 용어.:도교의 자주색은 일본 황실의 자주색으로.(<일본서기>).: ;중국 도교도 거울과 칼로 천황 제사, ;삼종신기(三種神器)(거울,,) : - ;천황=“신인(神人)”, ;천황 장수 비는 축사(祝辭), ;사방배(四方배) ;의식. :‘신도(神道)’란 불법과 대립되는 것인 동시에 도교적. ;

;왕인(王人)의 자손들 매장 고분군에서 ;동왕부(東王父)”, “서왕모(西王母)”라 적힌 신수경(神獸鏡) ;발견.

;히미코 여왕이 ;귀도(鬼道)로써 백성을 이끈다”(<삼국지> ;위지, ;왜인전) ;

;<일본서기> “상락지국(常樂之國)” ;언급한 상세(常世) ;사상.(신선사상) ;

;기비노 마키비(吉備眞備)(695-775) ;중국에 유학 ;음양도(陰陽道)” ;대표, ;구카이(空海)(774-835) <삼교지귀(三敎指歸)> ;저술, ;도교 깊이 연구.

;헤이안시대, ;외래문화 자국에 소화. ;구케(公家) ;시대였으므로 착취당하던 백성의 현실도피 수단으로. ;귀족들 불로장생 추구. ;문학에 도교적 색채. ;외단(外丹) ;제련. ;병이 나면 ;슈겐샤(修驗者)”에게 치료받아. ;의학서 ;<의심방(醫心方)>

;가마쿠라.무로마치시대, ;무가사회, ;불교의 ;생사초탈(生死超脫)” ;유행. ;도교가 민족신앙에 흡수, ;신도(神道),슈겐도(修驗道),음양도(陰陽道),밀교(密敎). ;특히 슈겐도(修驗道)에 주로 흡수.

;에도시대에는 중국 도교경전 수입, <태상감응(太上感應篇)> ;등 도교 경전 출판. ;

;1654년 은원(隱元)선사가 가져온 ;<선서(善書)>, ;민간도교에 영향. ;

;키요시 유코(白楡子),<도덕경>,<금강경> ;배워 ;백유진인(白幽眞人)” ;자처.

;

5.고대도시

(1)기원

.기원전 ;1766-1122,혹은 ;1523-1027년으로 비정되어온 商나라는 정주와 안양이라는 두 도시를 도읍지로 둠. ;

.주나라의 제후국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과 그 주위의 근교로 구성된 조그마한 도시국가. ;

.기원전 ;8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제후국들이 ;2백여개 있었을 것으로 보임.

;

(2)고대도시의 특성

.분업은 미약하고 인력에 의존함. ;

.장인들에 의한 전통적인 생산양식. ;

.태어난 위치에서 노동하고 정해진 구역에서 생활함.

.1차집단(가족,친족)에 의한 사회통제. ;

.대가족제였으며 아들을 선호함.

.가치관과 신앙행위가 유사함.

.엄격한 계급제도가 있으며 중간계급은 존재하지 않음.

.물건에는 정해진 가격이 없으며 특수계층이 지배하는 특수주의 사회. ;

;

(3)邑城 양식

.전통양식은 주도 낙양(洛陽:뤄양) ;3() ;구획(區劃)에서 시작 ;

;좌사우묘(左社右廟)

- ()경기도 양주는 서북에 城隍祠,동북에 향교,또는 孔子廟 배치 ;

;전조후시(前朝後市)

- ()경기도 양주는 중앙 宮城,북쪽 상업지역,남쪽 사직과 종묘 배치. ;

.방형(方型)의 도시 윤곽(지방(地方)의 대지관 반영)

.간선도로의 역할을 하는 남북대로와 ;朱雀의 명칭

.동서시(東西市)의 배치와 조리제의 도입

;長安과 慶州,나라(奈良),쿄토(京都)가 공통적. ;

;대륙문화의 파급 입증.

(4)중국

.제왕의 궁전을 중심으로 한 성곽도시

.크기 및 형태 ;

;오리지성(五里之城)(土築에 해당됨)

;십리지곽(十里之廓)(외곽에 해당됨)

.뤄양(洛陽)

;九里四方의 토지를 구획하여 주위를 성벽으로 에워싸고

;12개의 대문을 통해서만 외부출입 허용

;성벽 내부는 ;3조로 구획.左社右廟

;중앙에 王宮,배후에 市場과 시가지.“前朝後市

;오른쪽에 종묘(宗廟),왼쪽에 사직(社稷)”

;「조리제(條里制)」를 도입한 장안(長安)(오늘날의 시안(西安))

;동서는 ;2里 반,남북 ;2里의 方型토지에 성곽 건설

;전면에 주작대로(朱雀大路)가 뚫려 관문구실을 하는 명덕문(明德門)까지 간선도로 역할(길이 ;7킬로미터,노폭은 ;150미터)

;주작대로 좌우에 각각 ;5(東第五街,西第五街)가 나누어지고 다시 장방형의 블록.(작은 블록이 ;1750* 1625, ;큰 것이 ;3250 ;* 2750; 1尺은 ;0.303 ;미터.)

;

(5)일본:교토(京都)

.교토 시가지의 중심을 이루는 헤이안쿄우(平安京)

;당대의 장안경의 구조와 규모 모방. ;

.도시 규모는 남북이 ;5.3킬로미터, ;동서 폭이 ;4.6킬로미터의 방형.

.대내리(大內裏)로 표현되는 궁전을 중심으로 전면에 주작대로가 뜷려 나성문(羅城門)으로 통함.

;주작대로(朱雀大路)를 기준으로 동서에 좌우경(左右京) ;분할함으로써 방위개념에서 東西가 左右에 상응 ;: ;,, ;일 모두의 동일한 문화원류임을 입증.

.현재에도 헤이안쿄우는 동서에 좌우경이 분할되어 현행 행정구역명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;

;兩京은 다시 ;4개의 보()로 나누고, ;그것을 다시 ;16개 마치()로 세분됨. ;

;

(6)일본의 환호취락(環濠聚落)

.전국시대의 사회불안에 대응하여 사원과 민중불안의 결과로서 발생한 것.

.외적 방어, ;수전 경작 위한 관개용수 확보. ;

.나라 분지에 발달된 환호취락. ;

;환호 내에는 조리제(條里制)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경지 토지구획

;40-50호의 농가 밀집. ;

.니죠성(二條城)

;바쿠후 시대에 들어선 ;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(德川家康),서일본 다이묘(大名)들에게 명령, ;축조. ;

;왕의 거처로 사용.

;환호는 외호를 설치하여 차단기능 강화. ;

;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으로 왕래. ;

;환호 내측에 견고한 石城 구축하여 이중방어. ;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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